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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맹자"와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순자"
 
성선설과 성악설 중 무엇을 믿는가?
 
예전에는 성선설을 맹신해왔다. 사회 분위기 때문일까?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순자"의 존재감은 매우 미약했던 기억이 있다.
 
세계사를 보면, 아시아는 "성선설"을 서양은 "성악설"을 믿는 문화이다.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성악설"을 믿는다. 악에서 태어난 아이를 교육을 통해 선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교육 방식을 택하고 있다.
 
"모르는게 죄" 라는 말처럼, 어릴 땐 잠자리의 날개를 떼면서, 혹은 개미를 밟으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도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 나왔기에 이런 행위가 죄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왜 지금 시점에 이런 얘기를 하냐면, 저 두가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고 현재 나의 결론은 "성악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이탈리아는 밀라노 공국, 베네티아 공화국, 로마 교황청, 나폴리 왕국, 피렌체 공화국이라는 도시 국가를 중심으로 통합과 분열을 반복하는 시기였다.
 
공부를 열심히 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에서 외교관 역할을 했었다. 시대 상황이 매우 복잡했고, 주변 국가에서 이탈리아를 계속 노렸기에,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군주론"을 집필했다.
 
기본적으로 마키아벨리는 "성악설"을 믿었고,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행동원리에 따라 군주가 가져야 하는 태도를 솔직하게 묘사한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내용을 적어본다.
 

군주는 좋은 사람이어야 할까?

 
국내 정치만 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인들에 대해서 자기 잇속만 챙기는 나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는 "좋은 사람"은 군주에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나쁜 자질이라도 힘을 유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매우 불편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말이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대에 군주에서 내려온다면 죽음을 의미한다. 군주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군주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같다. 각 국가간의 외교에서도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지 않는가? 그게 착한 짓이 아닐지라도...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하며 쫒겨나가는 것보다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다. 매우 불편한 이야기지만 군주의 입장에서는 틀리지 않았다.
 

군주는 관대함을 지녀야 할까?

 
우리는 관대함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군주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치사하고, 싸가지 없다는 평판에 게의치 않고, 자기 나라를 지키고 국민들을 굶기지 않고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임을 얘기한다.
 
중요한 것은 관대하고, 착하다라는 평판을 듣는 것보다 힘든 상황을 만들어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다.
 

사랑받는 군주와 두려운 군주, 누가 더 나은 군주인가?

 
두 가지는 공존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두려움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한다. 인간의 생리에 대해서 얘기하면 그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인간은 감사함에 대해 빨리 잊지만, 두려움은 결코 잊지 않는다. 두려움은 미움을 받지 않는 것과 함께 할 수 있는 덕목이다.
 
마키아벨리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앞으로 시간이 흘러도 마키아벨리가 말한 인간의 본성은 유지 될 것인가? 스스로 되물어보자. 불편함, 상처, 두려움 보다 감사함을 더 오래 기억했는지...
 

인간은 세 부류가 있다.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는 가장 탁월한 자, 설명을 듣고 깨우치는 뛰어난 자, 이치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자로 나눌 수 있다. 군주라면 최소한 두 번째 부류에는 속해 있어야 한다. 군주가 말과 행동에 대해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면 대신은 군주를 감히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처신을 잘하게 된다. 대신이 유능하다는 것은 군주가 그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충성심을 유지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깨우침이란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마주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직관적이고 경험적으로 사람됨을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곁에 두게 되면 관직을 수여하고 잘 보살펴야 한다고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실용주의적 접근 방식을 얘기한다. 좋은 결과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한다는 뜻이다.
지인에게 어떤 얘기를 들었을 때, 그 얘기를 누군가가 알면 안될 때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해야 한다면 이는 속임수를 정당화 한다는 의미다.
 

정치는 도덕과 관계가 없다.

 
정치는 도덕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목표는 오로지 승리하는 것이지 "착하게" 플레이 한다는 것은 아니다.
 

위험 없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는 없다.

 
위대한 일을 성취하려면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적용되는 말이다. 큰 보상을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용기가 없다면 큰 보상을 바라지말라.
 

전쟁은 피할 수 없으며, 서로에게 유리하도록 연기할 뿐이다.

 
정치 상황에서 갈등의 불가피함을 얘기한다. 누군가와 경쟁할 때 그 경쟁을 피한다면, 상대방의 입지를 강화할 기회만 주게 된다.
 

인간은 사랑 또는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주요 충동에 의해 움직인다.

 
동기는 사랑과 두려움, 두 가지로 단순화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하고 두 가지로 나뉜다. 열정을 쏟을 수 있는 환경(사랑)과 삶의 불안함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일을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무력이나 사기를 사용하지 않고, 낮은 지위에서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종종 어떤 형태의 힘이나 속임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역사를 보면 대담한 행동 혹은 교활한 전략으로 권력의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다.
 

어떻게 사는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곧 몰락한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자신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상황에 따라 선하지 않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서, 필요에 따라 그것을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신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해지거나 약속을 맺었던 이유가 사라지면, 약속을 지킬 수도 없고 지켜서도 안된다.

 
모든 인간이 선하다면 이 애기는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악하고 신의를 지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만 생각하기 때문에 군주 역시 그들에게 했던 약속에 구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해야 한다.

 
현명한 군주라면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자신의 통치방법을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 살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날 경우 가혹한 조치를 취할 시간적 여유도 없을 테고, 은혜를 베푼다 해도 마지못해 베푸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군주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다룰 때에는 다정하게 대하거나, 철저하게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

 
사람을 다룰 때에는 그들이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다정하게 대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쉽게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해를 주어야 한다면, 복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예 확실하게 주어야 한다.
 

현재의 문제뿐만 아니라 미래의 문제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군주는 현재의 문제뿐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해 다분히 경계해야 하며, 특히 미래의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문제들이 발생하기전에 최초의 징후를 감지하면 대책을 세우기가 수월하지만, 문제를 방치하면 어떠한 대책이나 처방도 이미 너무 늦은 것이 되고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악한 존재이다.

 
인간이란 어떤 필요에 의해서 자신이 선한 행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언제나 악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군주는 자신의 이익을 따지지 않는 조언자를 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느 누가 하던 관계없이 훌륭한 조언이란 군주의 현명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훌륭한 조언에 의해 군주의 현명함이 비롯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무력을 갖춰라

 
무력을 갖춘 이와 그렇지 못한 이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평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력을 갖춘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또한 무력이 없는 군주가 무력을 갖춘 부하들 사이에서 안전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무력이 없는자는 상대를 의심하며 두려워하고, 무력을 갖춘 자는 상대를 경멸하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여 일을 잘 해나가기란 불가능하다.
 

자비보다는 질서

 
지나친 자비로움으로 혼란을 방치해서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보다, 소수의 몇 명을 시범적으로 가혹하게 처벌해서 질서를 잡는 군주가 더 자비롭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친 자비로움은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치는데, 군주가 집행한 가혹한 조치들은 특정한 몇몇 개인만을 해치기 때문이다.
 

처벌은 단번에, 은혜는 천천히

 
처벌은 단번에 시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정도를 덜 느끼기 때문에 반감이나 분노를 작게 일으킨다.
 
반면 은혜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그 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인간의 성향

 
사람들은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자보다 사랑받는 존재로 만드는 자를 해칠 때 덜 주저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의무의 결속으로 유지되는데, 사람들은 사악하기 때문에 자기가 이익을 얻을 기회가 생기면 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
 
반면,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 유지되므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을 얻는 부류와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부류를 잘 판단해야한다.
 
끝으로,
아마 이 책을 읽게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근데 정말 본인은 선한 사람일까? 선한 사람이라면 살면서 힘듬은 없었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군주론"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사랑이나 인자함보다는 규율과 명령 그리고 근엄함등으로 조직을 통치 관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현대 시대에 맞는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자기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서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들어 나는 "성악설"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군주론"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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